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요
그럴 생각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당신에게 너무 미안해요
잠이 들면 언제나 꿈을 꿔, 불투명한 비취 색 바다에 검은 해초들. 고운 모래사장에 묻혀있는 폐비닐과 너저분하게 자리한 포장마차들 그리고 시멘트 절벽위로 자리한 콘크리트 건물……. 항상 같은 꿈, 같은 장소.
몽(夢)
현관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확 달라졌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구나 싶은 청량한 공기와 기온이 기분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대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둘러보니 아직 나뭇잎이 다 물들지는 않았다. 달력은 9월이라 빨간 글씨로 써있고 입추가 지난 지 한참이건만 아직 날씨는 늦여름과 초가을을 오가고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심심치 않게 들리던 엘리뇨 현상이 생각난다. 몇 백, 몇 천년 전보다 겨우 1℃올라간 것뿐인데 여파는 생각보다 대단하다. 이상 기후라니. 아아, 인류는 대단하다. 기후조차 변동시킬 수 있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언제나 좋은 쪽으로는 안 가는 구만.
‘그런데 여름 다 끝난 마당에 바다에 놀러가자는 건 대체 무슨 저의야?’
대문을 닫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담장 근처의 자잘한 흙가루들이 발에 부스럭부스럭 밟힌다. 쭉 뻗어있는 시멘트 길을 총총 걸어가면서 작은 슈퍼, 보기에도 좋은 예쁜 집들이 스쳐지나가고 앞에는 전봇대들이 삐뚤게 서 있다. 도로에서 부웅-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차들도 보인다.
가족은 부드럽고 아는 것 많은 아버지, 입담 좋고 고스톱의 선두주자이신 어머니, 그리고 2살 차 나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남동생, 아쉽게도 매일 태격태격해도 좋은 어여쁜 여동생은 없다. 여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두루두루 사겨온 여동생들이 많은데, 그 여동생들 중 특히 가깝게 지내는 몇 명과 같이 바다에 놀러가기로 한 것이다. 아니, 그 중 한명이 생일날에 여름에 휴가 못 갔다면 바다에 놀러가는 게 소원이라며 부모님께 졸랐고 결국 난 보호자로 동행하게 된 게 이 일의 전말이었다.
‘이젠 익숙해서 아무생각도 안 드는군.’
집에서 버스터미널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20여분 쯤 걸으니까 슬슬 모습이 드러났다. 시골답게 1층의 소박한 건물, 투박한 네모의 모습은 군사시대의 산물…이던가? 에이, 몰라. 어쨌거나 저 시대를 초월하는 색감은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하늘색도 비취색도 아닌 저 애매한 군대색이라니! 한 때 디자이너를 꿈꿨기에 저 70년대 색 감각에는 정말 찬사를 금치 않을 수 없다. 부르릉거리며 옆을 지나가는 어느 휴지광고의 엠보싱 같은 철판 땜질한 자국이 드러난 버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젠 시골 아니면 볼 수도 없는 명물이 아닐까?
“으음~ 으음~ 엠보싱~ 화장지는~”
…10년 전 광고라서 그런 지 기억도 잘 안 나는 군. 눈 땡그랑한 파란 강아지가 지휘봉 들고 휴지 타는 광고였는데. 터미널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때가 타서 옻빛이 나는 긴 나무 의자가 여기 저기 있고 양 가로 작은 상점이 있다. 입구에서 딱 보이는 표 사는 곳은… 오늘은 생뚱맞은 노처녀언니다. 항상 TV를 보는데, 표 산다고 오면 엄청 귀찮아해서 사기 싫어지게 만든다. 아아, 정말 안타깝다. 터미널 바로 앞에는 기차역이 있는데 거기 차장 아저씨는 정말 건실한 미남인데 말이지. 친절하기도 얼마나 친절하고 말이야. 보통 사기업이 공기업보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거 아냐? 이것 참.
뭔가 잡생각을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덥썩 잡는다.
“언니이-!”
왼쪽 팔 점거 당했음, 오바. 머리에서 벨이 울리면서 보니까 역시 그 녀석, 미소년으로 착각받기 쉬운 외모의 풋풋한 여고생, 은지다. 오늘 역시… 군복스타일이다. 왠지 터미널이랑 되게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걸.
“다른 애들은? 미선이랑 다운이는 아직 안 왔나?”
물어보니 고개를 도리도리 거린다. 이 녀석들! 또 늦는군! 미리 약속시간을 넉넉하게 당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경험이란 것은 소중한 것이다. 다운이야 또 늦잠 자느라 늦을 테고 미선이는 기다려주다 같이 늦겠지. 안 봐도 비디오고 안 들어도 오디오다.
“…미리 당겨두길 잘했지. 보나마나 아슬아슬하게 올 테니 미리 표 끊어두자.”
“응~”
노처녀 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TV시청을 하고 있다. 보나마나 아침 드라마겠지? 울 어무이도 아침 드라마 본다고 나오지도 않았는데, 나도 저렇게 될까 걱정이다. 어차피 난 사극 밖에 안 보지만. 내가 오자 언니는 예의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9: 20분 버스로 춘천 4장요. 2장은 학생, 2장은 일반으로 주세요. 아 그런데 표 값이 얼마죠?”
“일반 14500원, 학생은 할인해서 10300원.”
“여기요.”
아쉽다. 39800원 식의 홈쇼핑 가격은 못 맞추겠군. 49600원이라, 200원 모자라는 가격이군. 왠지 모를 아쉬움을 뒤로하며 잔돈까지 맞춰낸 뒤 표를 샀다. 학생증 같은 건 안 보냐고? 여기는 워낙 시골인지라 확인 안 하지―가 아니라 내가 동생들 데리고 몇 번 버스를 탔었기에 기억하고 있는 거다.
여하튼 표를 사고 은지에게 가니까 그 새 두 녀석이 와 있다. 셋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니까 손을 흔든다. 눈썹까지 내려오는 앞머리에 구불구불한 뒷머리가 어깨를 약간 넘어서는 미선이는 오늘도 청치마에 사슬을 매달고 왔다. 전에 봤던 게 아닌 듯하니 놀러간다고 철공소에서 또 하나 끊었나보다. 난 액세서리가게에서 사슬을 살 생각은 했어도 철공소에서 끊을 생각은 못했는데, 역시 내 동생답게 수완이 좋구나. 그리고 이번 여행의 원인 제공자 다운이는 귀 밑까지 내려오는 컷트머리에 둥그런 사과귀걸이가 상큼함을 더해준다. 언제 봐도 참 느낌이 좋은 애라니까. 따듯하면서도 상큼한 것이 마치 데운 사과 같아.
“일~찍도 온다.”
“그럼요! 평소보다 일찍 왔죠?”
“…….”
다운이답다. 하긴 평소보다 일찍 온건 사실이긴 사실이지. 난 표를 흔들면서 탑승하는 곳으로 향했다. 시계를 흘끗 보니 출발 시간 15분전이다. 넉넉하지만 일찍 탑승하는 게 멀미에 덜 할 테니 애들 끌고 승차장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여기 춘천 4장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구멍 뚫어주는 할아버지! 도시에는 이런 게 없지만 여기 시골이라서 아직 남아있는 듯 하다. 실제로 내가 전국을 돌아다녔을 때 도시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면 역시 여기만의 고유한 일일까? 일할 곳 없는 할아버지를 실직시키지 않게 하는…….
“또 동생들이랑 여행가는 가 보지? 잘 갔다 와.”
옆에 친우분이랑 이야기하시다가 우리가 오니 환하게 웃으시면서 반겨주신다. 네모난 털모자 아래로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새어나왔다. 오늘도 줄무늬 티셔츠에 두툼한 붉은 조끼를 껴입으신 모습이 참 한결같으시다. 버스 터미널과 같은 색의 표에 스프링 소리가 나면서 구멍이 동그랗게 뚫렸다.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기념품 사올게요~”
“다음에는 같이 가요!”
“예끼, 실없는 소리는, 몸 성히 들만 갔다오라구.”
예-라며 합창하듯 대답해주고 춘천 행 버스에 올라탔다. 앞으로 20분 뒤, 우리는 춘천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자자, 그러기 전에~
“화장실 갔다 올 사람은 갔다 와.”
버스 여행의 필수지. 암.
약간의 시간이 흘러 버스운전사 아저씨도 올라오고 춘천으로 출발했다. 것 참, 서울이나 대구는 몇 번 가봤어도 춘천은 나도 처음인지라 길을 모르겠다. 정동진에 가본 적은 있지만 그건 중학교 소풍 때 학교서 기차 전세내서 가본 거였고 이건 버스니 원.
커튼을 치고 의자를 뒤로 눕힌 뒤 본격적으로 잘 태세를 갖추었다. 난 멀미가 무척 심해서 버스 타자마자 자는 게 낫다. 아무리 버스를 타도 멀미는 나아지지가 않는 게 멀미야 말로 인류 최대의 난치병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니 자려고?”
옆에서 미선이가 묻는다. 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꿈나라로 떠날 준비로 눈을 감았다. 직행버스 특유의 냄새는 정말이지 괴롭다. 어서 이 냄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아니면 다음부터 방향제를 가져오든가 해야지 진짜, 우욱.
“어제 나 꿈꿨는데 언니 생각나더라.”
“나?”
반쯤 눈을 뜨고 되물었다. 뒷좌석은 우리 4명이 다 앉았기에 은지랑 다운이가 뭐하는 지 다 보인다. 빠른 것들, 벌써 과자를 꺼내서 먹고 있다.
“왜?”
“언니가 전에 그랬잖아. 계속 같은 꿈 꾼다고, 그 때문인지 나도 어제 아래와 똑같은 꿈을 꿨거든.”
“…….”
같은 꿈이라. 정확히 말하면 장소가 같다는 건데……. 언제부턴가 잠이 들면 항상 같은 꿈을 꾼다. 등장하는 사람은 달라도 분위기는 달라도 그 장소는 항상 똑같다.
발가락 새로 들어오는 모래가루를 따라 걷다가 발을 담가 보면 불투명한 비취 색 바다는 그 발을 감춰버린다. 파도에 밀려온 검은 해초들은 사방으로 뻗어있고, 고운 모래사장에 묻혀있는 폐비닐은 끝이 찢어서 바람을 탔고 너저분하게 자리한 포장마차들에는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다가 나중에는 핫바와 햄을 팔고 있어.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그리고 시멘트 절벽위로 자리한 콘크리트 건물……. 삭막한 그 곳에는 회색 구름과 검은 새들이 빙빙 돌아.
언제 과외선생에게 이 말을 했더니 나보고 외계 드라마의 전파를 받을 수 있는 뇌구조라고 놀렸었지, 아마? 어느 만화가가 3일 연속으로 꾼 꿈으로 만화 그려 히트 쳤다는데 처음엔 나도 그런 건가 싶어 내심 기대하긴 했었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몰라, 여튼 난 잔다.”
“아앗! 언니!”
“몰라요, 몰라―”
미선이가 잡아당겼지만 난 아랑곳 않고 눈을 감았다. 잠아 잠아, 어서 와서 나랑 놀자꾸나.
ㅡㅡㅡㅡㅡ
2005년도에 썼던 겁니다. 실제로 꿨던 꿈이고 글로 옮긴 뒤부터는 더 이상 꾸지는 않습니다만 지금도 장소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요.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은지가 일루시안, 미선이가 원화인데 보고는 "언니 난 에스닷에서 끊은 거지 철공소에서 끊은 게 아냐!"라고 했는데 고치기 귀찮아요. (배째라 모드)
꿈에 등장한 장소는 여러 번 나왔었어요. 불투명한 비취빛 바다, 시멘트 절벽, 까마득하게 높은 회색 콘크리트 건물과 기다란 검은 새들. 때론 철교도 등장했는데 거기까진 안 썼네요. 그렇게 장소만 등장하다가 이야기로 연결이 건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살면서 때로는 알면서도 말해버리는 -절대 본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 나 자신이 제어가 되지 못해 쏟곤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꿈에서 딱 그랬어요.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는데 혼자 덜렁 납치된 동생 다운이를 구하기 위해 다른 동생들과 동분서주했을 때 도와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용한 게 아니었는데 이용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을 때 상대방이 보인 눈빛이 너무 슬퍼서 깨어나서도 계속 그 눈빛이 맘에 남아 며칠 간 심하게 우울해했습니다. 한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면서 다시 한 번 꿈을 꿔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참 심하게 감상적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얼굴도 그 눈빛도 생각나진 않지만 가라앉는 모루처럼 가슴을 꽉 눌렀던 그 감정도 희미하지만 ….
이 뒤로는 내용을 쓰면 쓸수록 꿈속에서 봤던 것들이 아스라히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진도를 못나갔는데 지금쓰라하면 완전 다른애기가 나올 거 같아요. 플롯은 머리 속에 있지만 그걸 이어주는 사건들은 희미하거든요.
여담으로 어느 만화가가 3일 연속으로 꾼 꿈으로 히트 친 만화는 한승원의 프린세스입니다.
그 눈 땡그란 파란 강아지가 나온 광고는 비바였나? 아마 그 화장지 광고였을 거에요.
등장하는 군대색 터미널은 제 고향 터미널입니다. 아직도 저 색입니다 - -;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앞에 기차역이 있는 것도 똑같고 퉁명스런 언니와 친철한 승무원 아저씨도 실존 인물이에요. 지금은 직원이 퉁명스런 언니에서 싹싹한 아주머니로 바꼈습니다. 기차는 안 탄지 오래라 모르겠어요. 구멍 뚫어주는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요
그럴 생각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당신에게 너무 미안해요
잠이 들면 언제나 꿈을 꿔, 불투명한 비취 색 바다에 검은 해초들. 고운 모래사장에 묻혀있는 폐비닐과 너저분하게 자리한 포장마차들 그리고 시멘트 절벽위로 자리한 콘크리트 건물……. 항상 같은 꿈, 같은 장소.
몽(夢)
현관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확 달라졌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구나 싶은 청량한 공기와 기온이 기분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대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둘러보니 아직 나뭇잎이 다 물들지는 않았다. 달력은 9월이라 빨간 글씨로 써있고 입추가 지난 지 한참이건만 아직 날씨는 늦여름과 초가을을 오가고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심심치 않게 들리던 엘리뇨 현상이 생각난다. 몇 백, 몇 천년 전보다 겨우 1℃올라간 것뿐인데 여파는 생각보다 대단하다. 이상 기후라니. 아아, 인류는 대단하다. 기후조차 변동시킬 수 있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언제나 좋은 쪽으로는 안 가는 구만.
‘그런데 여름 다 끝난 마당에 바다에 놀러가자는 건 대체 무슨 저의야?’
대문을 닫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담장 근처의 자잘한 흙가루들이 발에 부스럭부스럭 밟힌다. 쭉 뻗어있는 시멘트 길을 총총 걸어가면서 작은 슈퍼, 보기에도 좋은 예쁜 집들이 스쳐지나가고 앞에는 전봇대들이 삐뚤게 서 있다. 도로에서 부웅-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차들도 보인다.
가족은 부드럽고 아는 것 많은 아버지, 입담 좋고 고스톱의 선두주자이신 어머니, 그리고 2살 차 나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남동생, 아쉽게도 매일 태격태격해도 좋은 어여쁜 여동생은 없다. 여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두루두루 사겨온 여동생들이 많은데, 그 여동생들 중 특히 가깝게 지내는 몇 명과 같이 바다에 놀러가기로 한 것이다. 아니, 그 중 한명이 생일날에 여름에 휴가 못 갔다면 바다에 놀러가는 게 소원이라며 부모님께 졸랐고 결국 난 보호자로 동행하게 된 게 이 일의 전말이었다.
‘이젠 익숙해서 아무생각도 안 드는군.’
집에서 버스터미널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20여분 쯤 걸으니까 슬슬 모습이 드러났다. 시골답게 1층의 소박한 건물, 투박한 네모의 모습은 군사시대의 산물…이던가? 에이, 몰라. 어쨌거나 저 시대를 초월하는 색감은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하늘색도 비취색도 아닌 저 애매한 군대색이라니! 한 때 디자이너를 꿈꿨기에 저 70년대 색 감각에는 정말 찬사를 금치 않을 수 없다. 부르릉거리며 옆을 지나가는 어느 휴지광고의 엠보싱 같은 철판 땜질한 자국이 드러난 버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젠 시골 아니면 볼 수도 없는 명물이 아닐까?
“으음~ 으음~ 엠보싱~ 화장지는~”
…10년 전 광고라서 그런 지 기억도 잘 안 나는 군. 눈 땡그랑한 파란 강아지가 지휘봉 들고 휴지 타는 광고였는데. 터미널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때가 타서 옻빛이 나는 긴 나무 의자가 여기 저기 있고 양 가로 작은 상점이 있다. 입구에서 딱 보이는 표 사는 곳은… 오늘은 생뚱맞은 노처녀언니다. 항상 TV를 보는데, 표 산다고 오면 엄청 귀찮아해서 사기 싫어지게 만든다. 아아, 정말 안타깝다. 터미널 바로 앞에는 기차역이 있는데 거기 차장 아저씨는 정말 건실한 미남인데 말이지. 친절하기도 얼마나 친절하고 말이야. 보통 사기업이 공기업보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거 아냐? 이것 참.
뭔가 잡생각을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덥썩 잡는다.
“언니이-!”
왼쪽 팔 점거 당했음, 오바. 머리에서 벨이 울리면서 보니까 역시 그 녀석, 미소년으로 착각받기 쉬운 외모의 풋풋한 여고생, 은지다. 오늘 역시… 군복스타일이다. 왠지 터미널이랑 되게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걸.
“다른 애들은? 미선이랑 다운이는 아직 안 왔나?”
물어보니 고개를 도리도리 거린다. 이 녀석들! 또 늦는군! 미리 약속시간을 넉넉하게 당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경험이란 것은 소중한 것이다. 다운이야 또 늦잠 자느라 늦을 테고 미선이는 기다려주다 같이 늦겠지. 안 봐도 비디오고 안 들어도 오디오다.
“…미리 당겨두길 잘했지. 보나마나 아슬아슬하게 올 테니 미리 표 끊어두자.”
“응~”
노처녀 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TV시청을 하고 있다. 보나마나 아침 드라마겠지? 울 어무이도 아침 드라마 본다고 나오지도 않았는데, 나도 저렇게 될까 걱정이다. 어차피 난 사극 밖에 안 보지만. 내가 오자 언니는 예의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9: 20분 버스로 춘천 4장요. 2장은 학생, 2장은 일반으로 주세요. 아 그런데 표 값이 얼마죠?”
“일반 14500원, 학생은 할인해서 10300원.”
“여기요.”
아쉽다. 39800원 식의 홈쇼핑 가격은 못 맞추겠군. 49600원이라, 200원 모자라는 가격이군. 왠지 모를 아쉬움을 뒤로하며 잔돈까지 맞춰낸 뒤 표를 샀다. 학생증 같은 건 안 보냐고? 여기는 워낙 시골인지라 확인 안 하지―가 아니라 내가 동생들 데리고 몇 번 버스를 탔었기에 기억하고 있는 거다.
여하튼 표를 사고 은지에게 가니까 그 새 두 녀석이 와 있다. 셋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니까 손을 흔든다. 눈썹까지 내려오는 앞머리에 구불구불한 뒷머리가 어깨를 약간 넘어서는 미선이는 오늘도 청치마에 사슬을 매달고 왔다. 전에 봤던 게 아닌 듯하니 놀러간다고 철공소에서 또 하나 끊었나보다. 난 액세서리가게에서 사슬을 살 생각은 했어도 철공소에서 끊을 생각은 못했는데, 역시 내 동생답게 수완이 좋구나. 그리고 이번 여행의 원인 제공자 다운이는 귀 밑까지 내려오는 컷트머리에 둥그런 사과귀걸이가 상큼함을 더해준다. 언제 봐도 참 느낌이 좋은 애라니까. 따듯하면서도 상큼한 것이 마치 데운 사과 같아.
“일~찍도 온다.”
“그럼요! 평소보다 일찍 왔죠?”
“…….”
다운이답다. 하긴 평소보다 일찍 온건 사실이긴 사실이지. 난 표를 흔들면서 탑승하는 곳으로 향했다. 시계를 흘끗 보니 출발 시간 15분전이다. 넉넉하지만 일찍 탑승하는 게 멀미에 덜 할 테니 애들 끌고 승차장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여기 춘천 4장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구멍 뚫어주는 할아버지! 도시에는 이런 게 없지만 여기 시골이라서 아직 남아있는 듯 하다. 실제로 내가 전국을 돌아다녔을 때 도시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면 역시 여기만의 고유한 일일까? 일할 곳 없는 할아버지를 실직시키지 않게 하는…….
“또 동생들이랑 여행가는 가 보지? 잘 갔다 와.”
옆에 친우분이랑 이야기하시다가 우리가 오니 환하게 웃으시면서 반겨주신다. 네모난 털모자 아래로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새어나왔다. 오늘도 줄무늬 티셔츠에 두툼한 붉은 조끼를 껴입으신 모습이 참 한결같으시다. 버스 터미널과 같은 색의 표에 스프링 소리가 나면서 구멍이 동그랗게 뚫렸다.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기념품 사올게요~”
“다음에는 같이 가요!”
“예끼, 실없는 소리는, 몸 성히 들만 갔다오라구.”
예-라며 합창하듯 대답해주고 춘천 행 버스에 올라탔다. 앞으로 20분 뒤, 우리는 춘천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자자, 그러기 전에~
“화장실 갔다 올 사람은 갔다 와.”
버스 여행의 필수지. 암.
약간의 시간이 흘러 버스운전사 아저씨도 올라오고 춘천으로 출발했다. 것 참, 서울이나 대구는 몇 번 가봤어도 춘천은 나도 처음인지라 길을 모르겠다. 정동진에 가본 적은 있지만 그건 중학교 소풍 때 학교서 기차 전세내서 가본 거였고 이건 버스니 원.
커튼을 치고 의자를 뒤로 눕힌 뒤 본격적으로 잘 태세를 갖추었다. 난 멀미가 무척 심해서 버스 타자마자 자는 게 낫다. 아무리 버스를 타도 멀미는 나아지지가 않는 게 멀미야 말로 인류 최대의 난치병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니 자려고?”
옆에서 미선이가 묻는다. 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꿈나라로 떠날 준비로 눈을 감았다. 직행버스 특유의 냄새는 정말이지 괴롭다. 어서 이 냄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아니면 다음부터 방향제를 가져오든가 해야지 진짜, 우욱.
“어제 나 꿈꿨는데 언니 생각나더라.”
“나?”
반쯤 눈을 뜨고 되물었다. 뒷좌석은 우리 4명이 다 앉았기에 은지랑 다운이가 뭐하는 지 다 보인다. 빠른 것들, 벌써 과자를 꺼내서 먹고 있다.
“왜?”
“언니가 전에 그랬잖아. 계속 같은 꿈 꾼다고, 그 때문인지 나도 어제 아래와 똑같은 꿈을 꿨거든.”
“…….”
같은 꿈이라. 정확히 말하면 장소가 같다는 건데……. 언제부턴가 잠이 들면 항상 같은 꿈을 꾼다. 등장하는 사람은 달라도 분위기는 달라도 그 장소는 항상 똑같다.
발가락 새로 들어오는 모래가루를 따라 걷다가 발을 담가 보면 불투명한 비취 색 바다는 그 발을 감춰버린다. 파도에 밀려온 검은 해초들은 사방으로 뻗어있고, 고운 모래사장에 묻혀있는 폐비닐은 끝이 찢어서 바람을 탔고 너저분하게 자리한 포장마차들에는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다가 나중에는 핫바와 햄을 팔고 있어.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그리고 시멘트 절벽위로 자리한 콘크리트 건물……. 삭막한 그 곳에는 회색 구름과 검은 새들이 빙빙 돌아.
언제 과외선생에게 이 말을 했더니 나보고 외계 드라마의 전파를 받을 수 있는 뇌구조라고 놀렸었지, 아마? 어느 만화가가 3일 연속으로 꾼 꿈으로 만화 그려 히트 쳤다는데 처음엔 나도 그런 건가 싶어 내심 기대하긴 했었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몰라, 여튼 난 잔다.”
“아앗! 언니!”
“몰라요, 몰라―”
미선이가 잡아당겼지만 난 아랑곳 않고 눈을 감았다. 잠아 잠아, 어서 와서 나랑 놀자꾸나.
ㅡㅡㅡㅡㅡ
2005년도에 썼던 겁니다. 실제로 꿨던 꿈이고 글로 옮긴 뒤부터는 더 이상 꾸지는 않습니다만 지금도 장소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요.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은지가 일루시안, 미선이가 원화인데 보고는 "언니 난 에스닷에서 끊은 거지 철공소에서 끊은 게 아냐!"라고 했는데 고치기 귀찮아요. (배째라 모드)
꿈에 등장한 장소는 여러 번 나왔었어요. 불투명한 비취빛 바다, 시멘트 절벽, 까마득하게 높은 회색 콘크리트 건물과 기다란 검은 새들. 때론 철교도 등장했는데 거기까진 안 썼네요. 그렇게 장소만 등장하다가 이야기로 연결이 건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살면서 때로는 알면서도 말해버리는 -절대 본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 나 자신이 제어가 되지 못해 쏟곤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꿈에서 딱 그랬어요.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는데 혼자 덜렁 납치된 동생 다운이를 구하기 위해 다른 동생들과 동분서주했을 때 도와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용한 게 아니었는데 이용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을 때 상대방이 보인 눈빛이 너무 슬퍼서 깨어나서도 계속 그 눈빛이 맘에 남아 며칠 간 심하게 우울해했습니다. 한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면서 다시 한 번 꿈을 꿔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참 심하게 감상적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얼굴도 그 눈빛도 생각나진 않지만 가라앉는 모루처럼 가슴을 꽉 눌렀던 그 감정도 희미하지만 ….
이 뒤로는 내용을 쓰면 쓸수록 꿈속에서 봤던 것들이 아스라히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진도를 못나갔는데 지금쓰라하면 완전 다른애기가 나올 거 같아요. 플롯은 머리 속에 있지만 그걸 이어주는 사건들은 희미하거든요.
여담으로 어느 만화가가 3일 연속으로 꾼 꿈으로 히트 친 만화는 한승원의 프린세스입니다.
그 눈 땡그란 파란 강아지가 나온 광고는 비바였나? 아마 그 화장지 광고였을 거에요.
등장하는 군대색 터미널은 제 고향 터미널입니다. 아직도 저 색입니다 - -;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앞에 기차역이 있는 것도 똑같고 퉁명스런 언니와 친철한 승무원 아저씨도 실존 인물이에요. 지금은 직원이 퉁명스런 언니에서 싹싹한 아주머니로 바꼈습니다. 기차는 안 탄지 오래라 모르겠어요. 구멍 뚫어주는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덧글
불신론자 2007/10/01 19:57 # 답글
일루랑 원화누나는 닉도 나왔는데 왜 다운이만(...)...역시 누나는 누나야.(...)
샐리온 2007/10/01 22:19 # 답글
뭔 말이야? 저 위의 글들이 다 꿈이라는 거야, 아니면 니가 말한 그 부분만 꿈이라는거야- -;;
아르메리아 2007/10/01 22:32 # 답글
불신 -왜냐면 다운이는 이글루를 안 하걸랑. 걘 대학 간 뒤론 아예 잠수라서 핸드폰으로도 연락이 안돼;샐리온 -여담빼곤 다 꿈. ---이라지만 실제로 터미널도 나왔어. 세세하다 싶은 부분은 비슷한 걸 따온거야. 저 꿈에 실존인물들이 많이 나왔어. 재네들이랑 같이 여행간 것도 그렇고 다운이가 납치당한것도 그렇고 그 떄 당시 레오카드가 시삽이었는데 핫바 장사 하고 있질않나 -_-; 마지막에는 버스타고 돌아오는데 건물 옥상에 그 남자가 다른 사람하고 서서 바라보고 있더라고.
불신론자 2007/10/02 11:11 # 답글
...뭐야 난 가끔 문자정도는 보내는데
원냥 2007/10/02 23:56 # 삭제 답글
실명 공개!! 에잇, 고소할테[..]
아르메리아 2007/10/09 14:23 # 답글
불신 -난 문자 답도 안 오더라. 망할 가시나 - -원냥 -우리 사이에 뭘(…)